교육은 그의 이상의 실현과 확충의 방법으로서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곧 공자는 중국 고대의 봉건사회가 붕괴되는 시대에 태어나, 적어도 周나라 초기의 文武 두 임금과 周公이 이룩하였던 봉건질서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논어 양화편에서 공자는 「만약 나를 등용하는 사람이
경험해봤기 때문에 더욱 대단해 보였다. 그 후 실제로도 공자는 20대 후반에 고대 관직제도, 예에 대해서 당나라 왕을 방문하여 얘기하였을 만큼 그 부문에 최고로 불렸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 가르침을 전했다. 이 장에선 논의의 편찬과정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공자가 살던 당시에는 예가 땅에 떨어지고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되어 아무리 방종할 정신조차 도덕형의 가신을 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개인에게보다는 원칙에 충실한 주장하였지만 폭력보다는 설득을 통한 개혁을 설교하였기 때문에 군주들은 공자인 제자들에게 권력을 위임하면 유혈
공자가 과연 그와 같은 평등교육의 실천에 노력한 교육자였는지는 의문이다. 즉 평등과 중요하게 관련되는 사회의 구조적 특성이 전통 사회의 그것과 오늘날의 그것과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논어》의 ‘교(敎)’와 ‘회(誨)’가 동일 개념이 아니며 또한 공자의 교육사상을
공자의 출생에서 청년기까지
- 제후국 노에서 기원전 551년 경 64세의 무관 공흘과 안징재라는 젊은 여자 사이에서 출생
- 공자가 3세 때 부친 공흘이 죽고, 17세 때 모친 사망
- 궁핍했지만 정직하고 성실했던 청년생활(위리, 승전이라는 직책을 맡음)
- 15세에 공부에 뜻을 둠
나. 공자가 학문에 뜻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