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이 순시차 평양성에 갔더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왕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우리 국경에 가득히 들어와서 城池를 파괴하고 있으니 구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신라를 구원하기 위한 마치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정한다는 것이다. 이엉 영락 10년인 400년에 5만의 대
광개토대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나가서 대항하지 못하여 한강 북쪽의 부락을 많이 빼앗겼다.“라고 했을 정도로 군사적 능력이 탁월한 군주였다. 또한 항시 은혜와 자비를 발휘하여 용서하는 따뜻한 덕화 군주로의 모습으로 기록되어있다.
1-2. 외관 특징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민
Ⅰ.서론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광개토왕릉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다양한 영역과 관점에서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연구가 辛卯年號 기사 등 몇몇 주제에 집중되어 왔기 때
구려사 왜곡으로 한․중관계는 위기를 맞고 있다. 양국이 시계를 거꾸로 돌려 적대관계로 되돌아갈 리는 만무하지만 미래를 같이 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다.
중국이 근래 들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묵묵히 혹은 음흉하게 준비하다가 사회과학원 산하의
관계의 우호적인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중국인들의 역사인식을 바로잡아야 양국간에 발전을 도모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신들의 변방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歪曲)으로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 직속 변강사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