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공동회’ ‘수구파 정부 대 독립협회’
- 결국 10월 12일 박정양을 정부 수반으로 하는 개혁파 정부가 탄생
⇒ 독립협회는 이 개혁파 정부를 상대로 관민공동회를 추진
4. 사회계약의 파기단계
- 만민공동회의 불법화
- 조선이 전제정치임을 말하는 대한국국제 선언
⇒ 일방적인 광무계
독립협회에는 윤치호, 이상재 등 외교계 인사들(개화지식인들)로 조직된 정동구락부 와 남궁억 등 중견실무 관료계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일반 대중들도 직접 강연회 에 참여하거나 기금을 냈다.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문의 건립 등은 정부와 독립협회 및 국 민들이 이룩해 낸
사회의 특별경찰권을 취소함에 따라 한인사회의 자치권은 상실되었으며, 대조선국민군단 역시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문들 닫는 등 이후 하와의 한인사회는 분열로 치달았다.
1915년 6월 박용만은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 차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그해 7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열사)
1월 9일 일본의 각 신문은 경시청의 발표를 받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범인은 경시청 경시 이시모리 이사오(石森勳夫)․순사 혼다 쓰네요시(本田恒義)․순사 야마시다 소헤이(山下宗平)․가와이 헌병상등병(河合憲兵上等兵)․우찌다 헌병군조(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