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맑아졌다.”라고 평가했다. 결국 ‘반정’이니 ‘재조지경’이니 하는 용어들이 사용되는 분위기 아래에서는-설사 광해군에게 평가받을 만한 치적과 장점이 있었고, 그의 시대에 무엇인가 배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광해군이나 그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지배층이 당면했던 문제점은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정치기반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왕위계승의 정통성 문제로 표면화되었는데 특히 대외문제와 결부시켜 왕위계승의 문제 제기가 심각했던 인조반정과 호란을 전후한 시기의 척화파 ․ 주화파의 대
조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의 실리위주의 현실적 외교정책은 전후에 피폐했던 국내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전쟁을 피할 수 있는 탁월한 정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척화론자들에게 당연히 거부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던 서인정권은
조선은 명과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대표적인 것의 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이후 대 후금 정책은 변화를 맞게 된다. 지금까지는 인조대 친명 배금 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광해군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논란이 되는 6가지 주제를 선택하였다. 대립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두 책을 비교분석하면서 즉위 이후 수많은 기로에 섰던 광해군의 선택을 되짚어보고자 했다.
2. 본론
1) 형제를 죽인 왕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에서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아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