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이후 대 후금 정책은 변화를 맞게 된다. 지금까지는 인조대 친명 배금 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이는 당시 명과 후금, 모문룡의 문제, 국내 세력 등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왜란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조선으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④ 인조반정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실리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었지만 성리학에 의한 이념을 중시하던 당시의 조선사회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북인이 광해군에 의해 중용되면서 소외되었던 서인세력은 광
지시한 것이었다. 그 후 광해군이 인조반정(1623)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왕에 즉위하였다. 인조는 친명배금의 정책을 썼으므로 후금과의 관계는 자연히 나빠졌고 이것은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조선의 서북방에서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주둔하고 있어 후금의 배후를 교란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진이 조선을 침공한다면 상당히 버거운 조선의 입장 때문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국제 정세를 능동적으로 파악해 명의 요구에 따라 강홍립이 이끄는 원군을 파견하긴 했지만 , 광해군은 상황에 따라 행동하라는 밀명을 내려 후금에 투항하도록 함으로써 실리적인 중립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 들어가면서
국왕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반정은 조선시대에 종종 일어났다. 그 중에 성공한 것은 중종반정과 인조반정뿐이다. 그 중에 가장 많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인조반정에 대해 알아보자.
1. 광해군의 대외정책
광해군은 명나라는 쇠약해지고 후금은 강성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