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의 서천으로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격문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1. 선정이유
조선사의 흐름을 바꾼 정치적 사건은 각종 사화, 반란 등이 있었다. 사화의 경우, 당파싸움이 생각나 다루기 싫어 조선 500년 역사 동안 일어난 반란을 찾아보았다. 다양한 반란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이름이 있는 것은 제1·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이몽학의 난,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
1. 임진왜란의 배경과 원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이 전쟁은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조선의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으며 약 백만 명의 백성이 학살당한 잔인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은 임진년
병자호란 농성기간 중 김상헌과 최명길의 양면적 역사인식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김상헌은 청나라와 타협을 거부하는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반면에 최명길은 명분을 굽혀서라도 국가를 보존하는 '주화(主和)'를 선택하였다. '척화'와 '주화'로 상반된 양인의 입장은 영화‘남한산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