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조선시대의 기녀랑 원칙적으로 관기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녀란 본래의 가무의 기예를 배워 익혀 나라에서 필요할 때에 봉사하던 여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신분상으로는 천인에 속했다. 관기는 또 경기와 지방기로 나위어 졌으며, 지방기
소속된 여기는 경기(京妓)라 불리운 반면에, 각 고을의 여기는 향기(鄕妓) 또는 외방여기(外方女妓)라 불렸다. 그런데 내의원과 혜민서에 소속된 의녀 및 상의원과 공조에 소속된 침선비가 경기라 불리운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에 개인의 자격으로 기예를 판 서울의 여기도 경기로 불렸다.
조선시대기생(기녀)제도
기녀는삼국시대의 유녀(遊女)에서 비롯된 것으로일찍부터 우리 역사에 나타난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기녀를 배치하였다. 기녀는 관청의 행사와 관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필요하였다. 따라서조선시대의 기생은 관
기생으로 이름을 올린다. 수급비 가운데 자색이 있으며 주탕이나 기생으로 승진하기도 하고, 의녀로 선상된 기생도 있으며 관에다 양곡이나 돈을 바쳐서 기적에서 몸을 뺀 기생도 있다.
▶기녀제도의 유래
우리나라의 기녀제도는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시대의 유녀(遊女)에서 비롯
시대 여성문화의 중심에 서있었던 여류 예술인으로서의 사회적 자리매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기녀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본연의 의미가 왜곡된 채 상품화된 성으로서 이 시대에 인식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은 기생의 왜곡된 이미지일 뿐 그 자체가 아니며, 한국근대기의 한 지점(일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