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醫女)와는 별도로 조선건국초부터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여기가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여기 150인, 연화대 10인, 여의(女醫) 70인을 3년마다 여러 읍의 연소한 비자(婢子)에서 뽑아 올린다.’라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된 여기는
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의 흐름과 함께 그 형태가 항상 변화해왔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의 경우, 과거 조선시대에는 왕을 중심으로 왕조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지금은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정치제도가 변천하였고, 이와는 다르게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과거 무사를 중
기녀인 경기(京妓)는 장악원에서, 지방 기녀인 관기(官妓)는 지방 소속의 교방 또는 창기소(娼妓所)에서 기녀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때문에 해당 관청의 관비에게 부과되었던 잡다한 신역(新役)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지만, 악기와 가무를 연마하여 기악에 대비해야 했다. 이 같은 제도 하에서 기녀는, 당
녀(盲女)의 자식인데 성격이 척당하여 남자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도 불렀다.
- <식소록>
진랑은 개성에 사는 맹녀의 자식이다.
- <조야휘언> 조선 후기의 학자 김시민이 우리나라 정치․제도․풍습 등에 관한 글을 각종 문헌에서 뽑아 부문별로 엮은 유서(類書).
이상 살펴본 바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