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여순항의 러시아군대를 기습함으로써 시작된 러일전쟁은 조선과 만주의 지배를 둘러싼 러.일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으며, 특히 명치 이래 정한론을 주장해온 일본의 오랜 야욕을 결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정쟁을 일으키자마자 중립을 선언한 한국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하여 한반도
민족의 단결은 조국독립을 위한 불가결한 전제라는 것도 인식했을 것이다.
Ⅲ. 일제치하의 민족지도자
1. 교육자로서의 조만식
1) 오산학교와 조만식
1913년 조만식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5년에는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3·1운동으로 투옥하였다 출소
교회에서 기독교 조선 남부 대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이 대회에서 임원진을(회장 김규식) 선출하고 일제 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갖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 독립을 위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했
교회(맹호은선교사)의 학교였다. 1919년 4월 서울 중동학교 입학하였으나 1920년 4월 3일 부친 손종일장로의 독립만세 운동으로 구속되고 이 일로 인하여 서울 중동학교 자퇴하였다. 학문에 대한 열의로 인하여 1921년 일본 동경으로건너가 스가모 중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 하게 된다. 1929년 3월 6일 경
한국민족을 위하여 베풀어주셔야하는 구원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독립단 통고문에 보면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것,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매일 기도와 성경묵상을 통해 신앙 투쟁을 전개할 것’을 말하였는데,
월 - 사 10: 앗시리아에 대한 장절
화 - 렘 12: 유다멸망원인,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