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기와는 수키와와 암키와 그리고 수막새, 반쪽수막새, 끝암키와, 치미, 착고기와 등으로 구분된다. 수키와와 암키와 그리고 문자가 기입된 명문수막새는 집안지방에서 초기의 것이 발견되었고,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는 연꽃무늬수막새가 427년의 평양 천도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제
기와 높이에 있어서 차이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공간 구성은 지붕을 통해 하나의 통합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다양한 개성을 갖고 있는 건축물들의 성격을 지붕을 통해 하나로 통합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적 처리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건물에서 얻어지는 위압감을 완화시킬 수 있
기와는 판형으로 암·수키와의 구분없이 고정시킬 수 있는 돌기가 달려 있었다.
서주 중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지붕 전체에 기와가 사용되었으며 이 시기부터 수막새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초기에 암.수키와가 분리되어 제작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부터 기와가 전국 각
연꽃의 변형된 잎이 상감기법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은 청자에 한정된 인용이 아닌 불상의 앙련좌와 복련좌, 사찰의 단청 및 조각, 가구, 복식 등 다양한 곳에 미적,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들어가 있다.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청자 주전자(도판2)의 경우도 앞에서 언급한 매병과 같은 균형
고구려를 통한 것이 기록상 최초라 할 수 있다. 이후 한반도 주변국에도 불교가 파생되었고 고구려를 포함한 백제, 신라에 많은 수의 절이 세워지면서 그 종교적 뿌리를 확고하게 심게 된다. 불교의 포교로 인한 사람들의 불교사상이 깊어질수록 자연스러운 형태로 그 문화 또한 생활 속에 깊게 파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