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의 사위와 딸
ㄴ. 신귀족 세력과 여왕의 위기
ㄷ. 청병외교의 계기
ㄱ. 당태종의 대대적 공격 안시성에서 실패.
ㄴ. 이후 지속적인 공격 실패로 태종은 649년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는 유언 남기고 사망.
ㄷ. 고구려 배후의 세력과 연계하여 협공하려는 계획.
ㄹ. 당나라의 #1영입 대
2. 대 왜 외교
고구려와의 연합구축에 실패한 김춘추는 계속적인 백제의 침략을 방어하기위해 당에게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당 태종은 불확실한 답변을 주었고 당의 고구려 침략에 원군을 보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그 사이에 오히려 백제에게 당항성을 비롯한 7개의 성을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그의 누이동생이다.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이 되었다.
어린 시절
김유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天明)부인이 그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소생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므로 혹시 천명부인보다 약간 뒤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삼국사기』에는 맏딸, 『화랑세기』에는 둘째딸이라고 나온다.) 이 경우 천명부인은 정비가 아닌 후비의 소생일 것이니, 사관(史官)은 그 출생신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