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백성들은 적잖이 기뻐했을 것이다. 여왕의 즉위로 빚어질 사태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을 텐데, 이러한 조치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여성 성불론과 선덕여왕
한반도의 역사에서 여왕의 등극은 유독 신라에서만 존재하였다. 신라의 여왕은 선덕
사회에서 유사한 사례가 많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사다함이 세종에게 자신의 부와 권력을 물려준 것도, 또한 색공지신의 신분인 미실이 수많은 왕과 풍월주들과 정을 통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를 이해했던 세종은 신라 시대의 사회상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신라를 해체하고 고려를 성립시킨 주역들이다. 따라서 호족은 신라의 중앙정치가 문란해져가는 시대적 환경에서 성립된 존재로서, 나말의 여러 지방세력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신라말 ․ 고려초의 호족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사회변동과 고려 사회를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반란으로 인해 780년 중대 무열왕계가 무너지고 하대 원성왕계가 전개되었다. 하대는 780년부터 신라가 멸망하게 되는 935년(경순왕 9)까지의 시기로 정치 · 사회 등 변혁의 시대였다. 특히 중앙정치 세력이 쇠퇴하고 지방 세력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왕권의 쇠퇴 및 골품제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 왕은 배필은 위홍 대각간이다
《삼국유사의 기록》
신라 시대 때에는 근친에 대한 금기가 심하지 않았다.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처남 매제간이면서 사위 장인(김춘추의 둘째 딸이 김유신의 처)인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선덕과 진성여왕 사이에 사회의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