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백성들은 적잖이 기뻐했을 것이다. 여왕의 즉위로 빚어질 사태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을 텐데, 이러한 조치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여성 성불론과 선덕여왕
한반도의 역사에서 여왕의 등극은 유독 신라에서만 존재하였다. 신라의 여왕은 선덕
구귀족출신의 이찬 칠숙,아찬 석품의 모반과 실패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이를 알아
차리고 칠숙을 잡아 그를 동쪽 시장에서 목베고 구족(九族)까지 멸했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가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보고자 하여, 낮에
세력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포로 획득의 의미가 컸던 과거의 전쟁과는 달리 총력전의 형태를 가졌으며 대왕의 영토를 확장한다는 의미가 더 강해졌다. 왕토 확장의 의미는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는 친솔형親率型전쟁의 빈도가 높아졌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와 함께 그 이전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에 반발한 귀족들의 움직임이라고 보는 시각이 다수이나, 오히려 후계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진평왕의 책략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의 중심이 덕만에게로 집중되었고, 말년에 벌어진 비담의 난을 제외하고는 내정의 안정을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