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타이완은 그 선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 연설은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에 청신호를 보냈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실제 의도는 바깥지역에 대해서는 묵인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방위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도였다. 북한에서는 이 연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미국이 동아시아 방위선을 구
전쟁을 막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서운 일은 전쟁만이 아니라 이 상태가 장기화되고 분단이 영구화되는 것이다. 걸프전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미국의 봉쇄정책이 석유강국 이라크를 어떻게 파멸로 몰아넣었는가를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저항 능력의 상실은 곧 전쟁이라는 것도
남북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정부는 1970년 8.15선언 이후 취해 온 남북 간의 평화공존과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 가지 제안들을 종합, 체계화하여 1974년 8월 15일 대통령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 평화 정착 → 상호 문호개방과 신뢰 회복
16 군사 정변 당시 미국군의 불개입 정책에 영향을 미쳤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국군부가 미군정과 주한미고문단에 의해 창설되고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이해관계에 충실하다는 것과 한국군의 작전권이 주한유엔군에게 있다는 점도 쿠데타 정권의 성립에 있어 중요한 요인이다. 군
한미공모설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