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정책의 변화는 데탕트라는 세계적 정세에 영향을 받은 것보다는 미국, 중국 등 강대국 사이의 화해가 자신들의 안위에 불안한 요소로 인식한 남과 북의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구상을 선언했고 이에 의거해서 남북 당국간 최초의 대화인 적십자회담이 성사
Ⅰ. 서론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북한의 핵실험, 그리고 3번에 걸친 서해교전 등. 남북관계는 좋아지는 듯 하다가도 다시금 관계가 경색되는 그러한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그 와중에 북한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인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실효성 논란도 더욱 가
관계속에 영향 아래서 또한 양국 정상의 직접적 대화를 통한 것이 아닌 공동성명의 수준에서 진행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1차 남북정상회담은 남북의 정상이 각기 남북을 대표하여 합의 내용을 공동선언 형식으로 서명하였다는 점, 또한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남북한 당사자 중심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대화에 진지하게 나설 수 있게 하는 환경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채과 구조적 한계.” 2003.p.295.을 참고.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게 한 결정적인 계기는 김대중 정부의 그와 같은 일관된 정책 기조 아래 2000년 3월 9일에 있은 베를린 선언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회담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 25일의 취임사, 3·1절 기념사를 통하여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특사 교환과 북한이 원한다면 남북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