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계(老論系) 문인들에 의해 당시(唐詩)는 물론 송시(宋詩)도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다. 김창협(金昌協, 1651년~1708년)과 김창흡(金昌翕, 1653년~1722년)은 이러한 문단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17세기 조선 한문학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서술해 보겠다.
하는 다산에게 정조는 임무를 맡겼다. 정조가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배다리)를 놓을 때 다산이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을 상기하면서, 다산에게 수원 화성의 설계도를 작성해 바치라고 명한 것이다. 신도시 수원 화성은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계획한 각별한 것이었다.
대신 5도(안찰사),양계(병마사)설치
cf. 고려 안찰사: 임기6개월, 임시순찰직, 상피제 원칙만 있고 적용안됨
조선 관찰사: 임기360일, 상주총책임직, 상피제 적용
cf. 상피제: 자기연고지로 부임못하고, 친족끼리 같은 관부에 못있게 하는 제도
양계의 방어사주, 진은 초기, 5도의 주부군현은 예종때 마
사상을 탄압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주자학 자체에 대한 열정과 순수성은 퇴계, 율곡의 문인들까지는 유지되다가 17세기 이후, 사문난적을 가리는 사문시비는 권력투쟁시 정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단죄하는 법이 되었다.
그러다가 숙종 43년에 왕과 노론의 이이명 사이에 이루어진 정유독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