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론의 강력한 반발로 세자 교체는 이뤄지지 않았다.
숙종이 승하하고 세자는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 즉위 후에도 노론일색의 정국은 유지되었고, 경종 즉위 1년 만에 노론은 노골적으로 다음 세제 책봉을 요구하였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리」라는 말은 신하가 입에 담을
영조와 가족 그리고 백성들을 위협하는 천하의 패륜아이자 망나니였던 것일까? 나는 사도세자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인물 및 사건들과 역사를 돌아보며 이를 파헤쳐보고자 했다. 나는 먼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언급한 다음, 이를 둘러싼 사회, 문화, 정치적 사건들을 간단히 학습해보고자
사건, 즉 증거 조작이 많고 견강부회가 심한 정략적 사건을 일으킨 서인의 처리 문제를 두고 나누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북인은 정여립 역모 사건을 조작이라 보면서 역모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명확한 증거도 없이 불순하다거나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 나주에 괘서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 토역과를 보일 때 그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은 왕권 강화를 통해 노론과 소론을 견제하며 군제.경제 개혁을 이루고, 탕평파를 육성하는 등 정권 안정을
<조선왕조실록 요약_3>
제 17대. 효종
▣ 북벌운동 추진 (1649~1659년)
- 형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봉림대군(효종)은 청에 대한 복수심을 안고 귀국 함
- 즉위하자 인조의 뜻을 이어받아 북벌운동을 시행(당시 집권세력은 서인)
- 군사를 키우기 위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