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상의 출현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 한국 민족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도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대두한 점에서 동학사상과 유사한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근대적 사회개혁과
대한 반감에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랑의 본질이란 <자기자신의 의식을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의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망각하고 동시에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획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의식이 원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회적 격
겸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동학은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제시해 주며,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달리 당시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토지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년~1918년)을 벌이고 기한부 신고제를 시행, 수많은 농민들의 토지를 침탈하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토지, 왕실의 토지까지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기게 된다. 이렇게 강탈한 토지를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팔았고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80%가 일본으로 수출이
농민층 - 대규모의 토지를 빌어 경영하는 자본가적인 농업경영가 - 과 중산층인 자영농, 소작농, 영세농, 그리고 토지가 없는 농업노동자가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들의 토지로서는 생활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고, 18세기의 급격한 인구증가와 분할상속제는 농민의 영세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