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평의회가 조직(1944. 1)된 이후 정세는 변화했다. 소련의 지원에 따라 이들은 1944년 7월 폴란드국민해방위원회를 설립했다. 헬림에서 설립된 폴란드국민해방위원회는 곧 루블린으로 옮겼고, 1945년 1월 임시정부로 발족됐다. 런던망명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1944년 12월 폴란드국민해방위원
국내적으로 일제식민지시대를 극복하는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기에 국제정치질서를 규제하던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에 도전하는 노선을 걸었으면서도 끝내는 그를 극복, 민족해방으로 이끌었던 중요한 힘이 되었다.
Ⅰ. 서론
남한 민족주의자들이 남북회담과 통일운동을 추진한 배경으로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좌우․남북 합작의 경험이다. 먼저 1948년 2월 16일 김구․김규식이 남북회담을 제의한 「2월서신」에는 해방직전 임시정부의 좌우합작 시도가 상당히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一九四四年
임시정부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및 평가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대비된다. 하나는 기성학자들의 평가로 대체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 내용은 첫째, 임시정부가 3.1운동의 산물이고, 둘째 우리 역사에서 수립된 최초의 민주공화정체(民主共和政體)이며, 셋째,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법통성을
강화’가 정부의 주요 임무로 헌법에서 규정되었다. 이는 곧 정부나 국가 단위의 독립전쟁 수행을 예상한 조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위한 법령 정비작업을 계속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1919년 11월 5일 임시정부 법률 제2호로「대한민국임시관제」를 제정하였다. 이 관제에는 독립군 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