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항일빨찌산그룹 사이의 합작 모색은 1948년의 「2월서신」에서 처음 비롯된 것인가? 이것 역시 해방 이전의 前史가 있었다. 먼저 1942년에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백범일지』하권에서, 김구는 이미 김일성과 만주지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情勢로 말하면 東三省 方面에 우리 獨立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임시정부는 그 뒤 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해(上海)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런데 정부라고 하면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일반
계기로 30년대에 의열투쟁 선택
-1932, 김구의 주도로 ‘한인애국단’ 활동
:이봉창, 윤봉길의 의열투쟁의 성공으로 임정에게 활력
-1937, 중일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의 전시체제에 대한 대비와 보다 적극적인 군사활동 이 절실해짐.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군무부에 ‘군사위원회’ 설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과 목적
1. 임시정부의 조직
국내에서 1919년 3월 1일에 3․1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민주 공화 정부를 세워야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리하여 민족의 지도자 수십 명이 국제 도시인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어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약속하였다.
투쟁을 벌였다. 특히 3.1운동 직후부터의 큰 규모의 독립군의 전투활동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의 활동은 이미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전투행위를 한 것과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 … 중 략 …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건국강령은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