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항일빨찌산그룹 사이의 합작 모색은 1948년의 「2월서신」에서 처음 비롯된 것인가? 이것 역시 해방 이전의 前史가 있었다. 먼저 1942년에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백범일지』하권에서, 김구는 이미 김일성과 만주지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情勢로 말하면 東三省 方面에 우리 獨立
운동을 능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임시정부는 그 뒤 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해(上海)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런데 정부라고 하면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임
(1923 - 1931)
-이동기(1932 - 1939)
-말기활동기(1940-1945)
1. 초기활동
- 임시정부의 활동을 국내에 소개한다든지, 혹은 국내사정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정보연결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 -연통제·교통국
- 외교활동
- 문제점: 직속의 독립군 없음. 만주·연해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직접 통제 못함
정부를 주체로 한 국민통일임시정부(Prosivison Govt of National Unity)의 성립을 결정했다. 이미 미국은 1944년 4월까지 폴란드 지하공작 명목으로 2,500만 달러를 원조했고, 별도로 해외 폴란드군을 유지했지만, 런던망명정부를 끝까지 지원하지 못했던 것이다. 폴란드 런던임시정부의 실패는 임정에게 큰 충격
부정하고 독립을 확인 또는 완성하기 위한 자치단체를 조직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1919년 5월 국무총리 이승만 명의로 발표된 「통유」 제1호에서도 반복되었다. 즉, 납세 거부.송사 거부.군단위 자치단체 결성 및 자치제 시행 등을 촉구하고 나아가 일본 물화 배척운동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