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임시정부는 그 뒤 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해(上海)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그런데 정부라고 하면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일반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7년 국무회의의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동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안을 지지한다는 성
한국민에 대하여 우리 정부는 宣撫하기로... 그들은 최근에 대표 1인을 중경에 파견하여 우리 임시정부에 모든 충성을 다할 것을 표명”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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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의
3․1운동과 그 이념을 계승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독립군항전 등의 평면적인
정부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촉구하였고, 상당한 한계가 있었지만 한중연합을 매개로 한 적극 항전노선을 취하였다.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뒤 중국인들은 대체로 세 가지 동기에서 한국독립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인식하고 지원했다.
첫째는 한국이 전통적으로 중
Ⅰ. 서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 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趙素昻)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