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일본군에 저항하기 위해 한인 및 일본인 좌파 세력도 끌어들여 중용하였다. 일본인 공산주의자로 1938년 3월 무한으로 들어온 녹지선 부부는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제7처의 고문을 맡았고, 역시 일본 공산주의자인 청산화부는 1938년 6월 무한에 들어와 장개석의 정보 고문이 되었다. 한인 좌파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지사들 중 이동영, 이시영, 조소양 등의 제의에 따라 프랑스 사람이 살고 있는 상하이 보창로에 임시독립 사무소를 설치하고,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세우는 것이 순서였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각 도의 대의원 29명이 의
(1923 - 1931)
-이동기(1932 - 1939)
-말기활동기(1940-1945)
1. 초기활동
- 임시정부의 활동을 국내에 소개한다든지, 혹은 국내사정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정보연결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 -연통제·교통국
- 외교활동
- 문제점: 직속의 독립군 없음. 만주·연해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직접 통제 못함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1931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 원칙으로 발표한 삼균주의를 구체화한 내용이라고 했다. 후일 국무위원회의 결의만으로 효력이 있느냐의 여부로 의정원에서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삼균주의가 성립한 시기는 1930년 한국독립당 창립시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