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연도별 친일행각
1919년 이전
1919 ~ 1921년
1921 ~ 1937년
1937년
1939년 이후
제 1단계
임시정부에서
2년 동안의
독립운동
제 2단계
수양동우회 사건
제 3단계
통치권자에 대한 관념적인 협력정신
민족개량주의, 문화주의의 실현을 주장
의례준칙의 일본화, 생활방식의 일본화
2.2. 이광수의 변절 및 친일행각
2.2.1. 이광수의 변절
1917년 이미 무정으로 유명해진 이광수는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이를 갖고 상하이로 건너간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의 속사정은 춘원 같은 천재의 눈으로 볼 때 근대화된 문명국가인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친일행각은 사실상 처벌되지 않았다. 한국 전쟁 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재직하였고, 1957년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뇌일혈로 죽었다.
2. 시대 배경
한국 사회는 1910년 일본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그 이전에 추구해 오던 개화계몽운동을 더 이상 지속
독립신문 사장겸 주필인 이광수를 처음 만나게 되고 깊은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주요한이 친일행각을 하게 된 배경에도 대표적인 친일파 문학인 이광수와의 만남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요한은 『독립신문』에 ‘송아지’라는 필명으로 「조국(祖國)」등 수 편의 애국시를 발표하기도
친일 문학가 이광수는 단순히 창씨개명을 한것뿐만 아니라 일제말기에 학생들에게 “공부는 나중에 하고 당장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등의 친일시를 썼습니다. 그의 민족적경륜은 민족과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를 조장하여 독립운동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더욱이 여류 시인인 모윤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