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氐).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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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가는 조선 초기, 맹사성(孟思誠)이 지은 4수로 된 연시조.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강호에 묻힌 자신의 생활을 춘·하·추·동 사철의 자연의 변화와 결부시켜 각 한 수씩 4수로 읊은 것이다. ‘강호가(江湖歌)’ 또는 ‘사시한정가(四時閑情歌)’라고도 부른다. 연시조 형태로는 최초이며, ‘강호가’
설복습격 대패원병 납합출창황둔거 사시북새조안
나하추가 공격을 나와 복병을 두고 습격해 크게 원나라 병사를 패배하게 하니 나하추는 당황해 달아나며 이에 북쪽 변방이 조금 편안해졌다.
惟太祖自得國以後, 有心偃武, 常欲將百戰功臣, 解除兵柄, 只因北方未靖, 南服亦尙有餘?, 一時不便撤兵, 只
설광덕(薛??)이 관직에 물러났을 때, 하사받은 차를 늘어뜨려서 자손에게 전했다, 수레를 건다는 뜻으로,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둠
藪(늪, 덤블 수; ?-총19획; so?u)
심문계 복야는 관직을 물러나 안석과 지팡이를 받을 생각으로 즐겁게 채소밭에서 노래해 조정문에 자취가 없어 갑자기 윗사람을 능멸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