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학이라고도 불리는 송대의 성리학은 북송5자인 주돈이,장재,소옹,정호,정이를 거쳐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었는데, 주희는 이 과정에서 육구연과의 철학적인 의미를 담은 사상논쟁을 하게 되며 주륙논쟁 혹은 아호사에서 시작된 논쟁이라 하여 아호논쟁이라고 불리게 된다. 1183년 육구연의 제자였
논쟁이고 수준 높은 학문적 성과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재의 실력은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회재의 행장을 지은 퇴계 선생도 회재의 생존 시에는 그를 우러러 보지 않았으나, 회재의 卒後에 아들이 행장의 제작을 부탁하면서 遺著와 事蹟을 보내오자 비로소 그의 학문을 알았고, 무극태극 논변
퇴계선생은 높은 벼슬자리는 마다하고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원했다. 원래 이황은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의 형이 간신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재야로 물러가 숨을 굳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황이 살다 간 16세기
1. 유학의 전래 / 수용
(1) 유학의 전래
유학이 언제 우리나라에 전해졌는가 하는 문제는 그 정확한 시기는 확 실히 알 수 없으나 그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다.
(가) 은․주교체기설 : 이이를 비롯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기자동래설(基子東來說) 중국 은(殷)나라 기자가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