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을 하게 된다.
유배생활 중에 자신을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부르며 명실상부한 농부로서 삶을 즐기던 중 1082년 7월 적벽 아래의 장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그의 대표작 <전적벽부>를 쓰게 된다. 이후 1085년 신종(神宗)이 죽고 어린 철종(哲宗)이 즉위하면서 고태후(高太后)가 섭정하면서 조봉랑(朝
소동파의 생가가 서민의 거리인 사곡행에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우며, 뒷날 고관으로서 민중과 접해도 소탈하여 조금도 거리끼는 바 없이 서민 생활에 친숙하던 소식의 인품은 시정의 아이로서 자라난 환경 덕분인 것 같다. 소식의 연보를 만든 남송의 시숙과 부조는 단지 미산현 사곡행의 사제에서 태
소동파의 생애
송나라 저명한 문인가문에서 태어남
아버지 소순과, 아우 소철 또한 유명한 문인이자,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힘
22세 때 진사에 급제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지방관으로 전출
황주로 유배되었다가 철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대관을 역임
황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하이난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