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의 아버지소순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풍아한 아취를 지닌 그 생가에 삼소, 즉 아버지 순과 식, 아우 철, 세 사람의 사당이 명초에 세워졌다. 문호 소동파의 생가가 서민의 거리인 사곡행에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우며, 뒷날 고관으로서 민중과 접해도 소탈하여 조금도 거리끼는 바 없이 서
시문서화(詩文書畵)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알려졌다.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
소동파의 생애
송나라 저명한 문인가문에서 태어남
아버지소순과, 아우 소철 또한 유명한 문인이자,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힘
22세 때 진사에 급제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지방관으로 전출
황주로 유배되었다가 철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대관을 역임
황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하이난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