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부의 구성을 띠고도 있지만 또한 비교적 수사가 정리되어 있고 대우(對偶)에 얽매이지 않은 고문 시어를 쓰고 있어 문부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문부는 당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전형적인 작품으로는 두목(杜牧)의 아방궁부(阿房宮賦)가 있다. 구양수로 대표되는 북송 시대의 고문운동은 한유와 유
1. 구양수(歐陽修 : 1007~1072)
중국 북송(北宋) 때의 시인·사학자·정치가.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이지만 만년에는 '육일거사(六一居士)' 라고도 불렸으며, 시호는 문충(文忠). 송대 문학에 '고문'(古文)을 다시 도입했고 유교원리를 통해 정계(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구양수는 사
사람이면 당연히 생각할 것이다. 아는 이가 많겠지만, 소순은 소식, 소철의 아버지이고, 소식은 소철의 형이다. 아버지인 소순은 대중상부 2년에 탄생해 후에 친교를 맺은 구양수, 장방평보다 두 살 아래이다. 그의 형 소환과는 달리 학문을 싫어해서 소년 시절 다른 아이들처럼 책을 읽고 시문 짓는 법
사람됨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구양수는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한 작가의 준비단계, 즉 창작배경으로써 도의 수양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구양수는 먼저 無爲道士 李暻仙에게 준 시 <贈無爲軍李道士>에서 “오직 그 뿌리를 기르면 자연히 그 꽃은 빛이 난다네(<구양수전집 居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