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를 비롯하여 잠삼, 고적, 왕유, 맹호연 등 뛰어난 시인들이 나와 많은 작품을 남기었다. 이백은 출신은 알 수 없으나 쾌락과 환상의 시인이며 당시의 미국 취미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현세의 쾌락에 잠기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지닌 신선에 대한 동경을 노래하였다. 왕유가 고요한 자연
사상 등의 여러 면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한편, 당시의 특색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측전무후 때부터이다. 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왕으로 역사가 중에는 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의 치세 동안의 화려하고 아늑한 기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 4걸이라 불린 왕발, 노조린, 낙빈왕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비록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당시의 귀족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짙게 담겨져 있다. 두보는 712년 한남에서 당대의 시인이었던 두심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거의 관직에 기웃거리지 않고 일생을 가난과 방랑 속에서 보냈다. 약 1천4백수에 달하는 그의 시는 강한
성황을 이루어 오언 및 칠언의 율시와 절구의 형식이 완성되어 성당기에 이백·두보의 2대 시성을 비롯하여 시화일치의 묘미를 보여준 왕유, 전원과 자연을 읊은 맹호연, 정로이별을 읊은 고적·왕창령 등이 나오고, 중당기에는 백거이·원진, 만당기에는 두목(杜牧)·이상온·온정균이 나왔다.
대표적 시인으로서는 이 시기 전반에 활약한 이백(李白)과 후반에 활약한 두보(杜甫)가 있다.
이백은 이 시기 전반의 화려한 세상(世相)을 반영하여 오로지 쾌락을 노래하는 시를 특색으로 하였고, 초당의 진자앙(陳子昻)의 주장을 이어받아 한위문학(韓魏文學)의 기골을 부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