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교를, 프랑크인과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
블라디미르가 이 많은 종교 가운데 동방정교를 수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키예프인들의 현세 지향적이며 신인동격체인 민간신앙의 전통이 그리스 정교와 가장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정교회는 처
종교에 대해 갈망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가 자리 매길 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당시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라고 한다. 사도들은 부활한 예수가 그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대 사명을 받았다고 여겨졌고, 그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늘어나기 시
러시아의 중심인 북동 루스는 오히려 변경에 위치해 있었고, 모스크바도 아직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지배층을 포함해서 슬라브화 된 키예프 공국은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방정교회와 비잔틴 분화를 수용해서, 독특한 문화가 생겼지만, 13세기 초에 몽골에 의해서 정복되어 킵차크한국의
대한 사건으로 손꼽히는 동로마제국의 성상파괴운동과 동․서 교회대분열의 진행과정과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한 고찰이 따를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발칸반도와 러시아의 슬라브인들이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동방정교회의 기여와 함께 이들 지역의 독특한 역사 전개 과정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
러시아정교회인데 이는 동방정교회 소속의 독립교회이다. 처음에는 물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 관할 하에 있었으나 1589년에 총대주교구를 설립하면서 완전한 독립교회가 실현되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정교회는 국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장하였다. 국가도 러시아정교회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