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사제로서 희년과 대사면(大赦免)의 해에 면죄부에 관하여 설교해야 한다는 알브레히트의 요청에 따라 백성들에게 설교를 해야할 뿐 아니라 백성들의 고해성사도 들어주는 등 이 일을 방조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분노한 루터는 설교에서 면죄부의 부당성을 성토하는 한편 대주교에게 글을
교회의 부패로 인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종교의 분열과 다툼의 시기가 이어졌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부터 농민 전쟁 같은 사회개혁 운동도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의 제후들은 루터파와 카톨릭파로 나누어져 충돌이 일어났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는 모
황제 편에서 싸우고 교황을 이를 지원한다. 이에 힘을 가지게 된 황제는 개신교군을 패퇴시키고 프라하를 점령하여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처형하고 보헤미아를 재 카톨릭화 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황제는 강한 탄압을 가하게 되고 보헤미아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되는 멍에가 씌워졌다. 이는 독일
년 카알 5세 황제는 국회를 소집하고 루터에게 저서 내용을 취소하라는 명령에 취소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황제는 결구 루터를 제국의 죄인으로 단정했다. 이 때 잭슨 선제후인 프레데릭은 루터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부르트부르그 성내의 한 은밀한 방을 제공했다. 이 기간에 루터는 저 유명한 독일어
가톨릭 교회의 부패가 발단이 된 종교개혁은 루터의 개인적인 종교체험에서 출발하여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교권조직을 성서에 근거하며 비판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교리와 교회를 형성한 종교운동을 뜻한다.
이러한 종교개혁이 시작된지 100년도 되지않아 개신교는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