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화] 30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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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문화] 30년전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30년 전쟁을 채택하게 된 목적

2. 30년 전쟁의 발발 원인

(1) 간접원인
(2) 직접원인

3. 30년 전쟁 진행과정

(1) 제1기 – 보헤미아 시기(1618-1623)
(2) 제2기 – 덴마크 시기(1625-1629)
(3) 제3기 – 스웨덴 시기(1630-1635)
(4) 제4기 – 프랑스 시기(1635-1648)

4. 30년 전쟁의 종결 및 영향

(1) 전쟁의 종결 및 베스트팔렌 조약
(2) 종교적 영향
(3) 정치적 영향
(4) 사회∙경제적 영향

5. 결론
6. 교훈
7. 참고문헌
본문내용
(2) 직접원인
1) 개신교 연합과 카톨릭 제후연맹
1606년 작은 제국도시 도나우베르트에서 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성 마가 축제일에 축하행진을 벌이다 개신교들이 투석으로 방해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1608년 카톨릭 대표들은 1555년 이래 빼앗긴 모든 교회 재산을 요구하였지만 개신교들의 숫자가 많아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개혁주의 영주들과 루터파 영주들은 1608년 5월 12일 아하우젠에서 개신교 연합을 결성하였다. 이 개신교연합에 대항하여 카톨릭 진영에서도 1609년 7월 카톨릭 제후연맹이 국내평화의 유지와 카톨릭 신앙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바이에른 공국의 수도 뭔헨에서 결성되었다. 이렇게 개신교 연합과 카톨릭 제후연맹이라는 서로 적대적인 군사동맹이 각기 결성됨으로 말미암아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양 진영 사이의 충돌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2) 전쟁의 도화선 – 프라하의 창외투척사건
1611년 5월에 보헤미아 왕이 된 마티아스 황제는 카톨릭은 재수립하려 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영주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황제는 개신교 탄압정책을 실시하여서 프로테스탄트들을 자극하였다. 개신교 예배당을 철거하거나 종교개혁 행사로 격렬한 팜플레트를 발간하였다 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의 회합을 금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1618년 5월 23일에 즉시 해산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이에 분노한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는 봉기하여 궁정으로 진출하여 황제 마티아스의 두 총신 마르티니쯔와 슬라바타를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창외투척사건으로 페르디난드의 섭정위원회를 무너뜨린 보헤미아 제후들은 투른백작 마티아스의 지도 하에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30명의 집정관들이 임명되었고 예수회는 추방되었다. 페르디난드 2세는 비엔나로 도망하였고 임시정부는 황제군의 토벌작전에 대비하였다. 이제 30년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3. 30년 전쟁 진행 과정

(1) 제 1기 –보헤미아 시기
반란 직후 보헤미아의 신교도 귀족들은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진압에 나섰던 황제군을 격파 함으로써 보헤미아 분쟁은 독일 전체로 확대되었고, 이는 독일 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전란으로 휘몰아 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마티아스 황제는 스페인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토벌작전을 실시 했으나 보헤미아 사람들의 봉기 소식에 각 지역에서 개신교들의 봉기가 일어남으로 함스부르그 왕가는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 이후로 161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새로운 신성로마황제 선거에서 보헤미아왕 페르디난드 2세가 요한게오르그의 지지와 함께 7선 제후의 투표로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선출 되게 되면서 전쟁의 범위는 더욱 확대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유인 즉, 보헤미아 사람들은 개신교 연합의 지도였던 프리드리히 4세의 아들을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황제 페르디난드 2세는 카톨릭 연맹이 함스부르크가에 할 수 있는 조력에 관해 토의 함으로써 1619년 10월 8일 뮌헨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는 선제후권을 프리드리히로부터 바이에른으로 전환하고 황제는 리가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약체결 이후 리가는 막시밀리안에게 병력의 징집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막시밀리안이 전쟁에 개입되게 되며 스페인군과 작센선제후국 군대도 황제 편에서 싸우고 교황을 이를 지원한다. 이에 힘을 가지게 된 황제는 개신교군을 패퇴시키고 프라하를 점령하여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처형하고 보헤미아를 재 카톨릭화 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황제는 강한 탄압을 가하게 되고 보헤미아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되는 멍에가 씌워졌다. 이는 독일 신교도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계속된 원인 중 하나는 부유한 군인들에 인도된 사병집단 때문이며 그 중 뛰어난 용병인 만스펠트는 입신 출세를 위해 여러 차례 입장을 바꾸며 지나는 마을을 약탈함으로써 군대를 유지하였고 막시밀리안의 지휘하에 있는 틸리군대는 이런 만스펠트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전쟁을 통해 많은 땅과 이득을 얻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선제후라는 작위는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막시밀리안에게 넘어 가게 된다.
전체 정황으로는 프리드리히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군과 카톨릭 동맹군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대결양상이나 군사 정치적 측면에서 함스부르크 왕가에 적대할 세력이 없었고 이를 지원할 개신교 국가들은 자국의 문제로 지원이나 전쟁에 개입을 할 수 가 없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본 개신교 여러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개신교 연합의 세력이 와해 되며 개신교에 대한 탄압이 더해지자 중립을 지키던 다른 외국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서서히 제국의 문제에 끼어 들기 시작하기에 이른
참고문헌
참고 문헌
1)논문집
송요태 - 30년 전쟁의 원인 (육군3사관학교 논문집)
보헤미안 전쟁 (육군3사관학교 논문집)
30년 전쟁과 Gustav Adolf (육군3사관학교 논문집)
30년 전쟁기의 군사적 발전 (육군3사관학교 논문집)
김충섭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교회사전공) - 근세유럽의 30년 종교전쟁에 관한 연구
이동언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 30년 전쟁과 합스부르크 왕가

2)참고서적
김기련 [종교개혁사], (대전목원대학교출판부, 2001),
김광채 근세현세교회사
리차드 던(Richard S. Dunn), [근대 유럽의 종교전쟁시대], 임희완 역(대전: 예문출판사, 1986)
. W.C 완드「교회사근세편」 ,이장식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1),. G. Parker, the Thirty Year’s War,
양병우 외, ‘대세계의 역사
홍윤희, 「대 세계사 4」
S. Kettering, Judical Politics and Urban Revolt in Seventeenth Century France: The Parliament of Aix, 1629 1629,(Princeton:P. Univ. Press, 1978)
메리 플브룩, 독일사,

3)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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