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연의 사회였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성 회복’을 목표로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교회의 권위에서 벗어나 현세에서의 생활을 긍정하고 개인의 자율성과 주도성을 갖춘 ‘이성 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 특히 이성의 개발
교리에 반박한 것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었다. 그는 이것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게시했다. 이것이 그의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루터는 성경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에서 사람의 구원은 면죄부가 아니라 성서와 개개인의 신앙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음을 천명하고 사면보다는
교리에 관하여 처음으로 논쟁을 시작한 사람들은 카르타고의 남쪽에 있는 일부의 수도사들이었다. 어거스틴의 교리에 반기를 든 집단으로는 반펠라기우스주의 학파였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예정교리를 운명론으로 해석하여 그를 공격하였다. 또한 인간의 의지가 믿음과 일반적 의미의 선행에 대하여
인간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종교적인 경험 혹은 신앙을 체험한 결과라고 하는 유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길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신학 사상적으로 루터의 어거스틴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컸다. 초년 시절에,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어거스틴의 일치시켜 칭의에 관한 스콜라철학
강의를 들었다. 그후 1531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칼빈은 파리로 돌아갔다. 칼빈이 이 두 번째로 파리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학구적인 주석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저서로서 의미 깊은 저작이었다. 칼빈의 이 저작은 1532년에 나타났다. 이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