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아내는 루터의 일생의 반려자이자 종교개혁자의 큰 협력자였다. 10월에는 독일어로 첫 미사도 집행하고 찬송가도 발간되었다. 이로써 독일어 예배식, 회중의 찬송, 교리문답으로 예배의 개혁을 가져왔으며 교인들의 내적 발전 요소도 제공하였다. 1546년 2월 18일에 루터는 6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교육프로그램에서 으뜸가는 것이라고 해서 성서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독일의 기독교 교회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대신 그릇된 사상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에는 자녀를 보내지 말라”고 하였으며,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로서 종교의 개인적인 해석에 대한 권리
교육이 필요했다. 개혁교회는 통일된 신앙의 입장을 견지하여 신학적인 특성과 기준, 자취를 더듬어 복음의 내용과, 개혁교회의 입장 그리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신앙고백서들을 통하여 그 역사와 함께 내용과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앞으로 이루어져야할 시대적 요구에 대한개혁주의 역
루터의 개혁사상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을 들 수 있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신학이었던 스콜라 신학은 11-12세기에 이르러 민중들의 신앙을 당시의 제도적이며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몰아갔다. 그러자 여기에 대한 반동으
루터의 육체적 임재설과 쯔빙글리 의 상징설의 중간에 있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였다.
3. 루터와 멜랑히톤의 관계(상호보완적인 관계)
교회역사에 있어 위대하고 창조적인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뜻이 맞는 지도자들을 서로에게 도움과 위로가 되도록 연결시켜 주셨다. 16세기 종교개혁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