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교회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특히 마르부르크회담에서는 성찬에 대해 일치를 얻지 못하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U. 츠빙글리와도 결별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동맹의 꿈이 깨졌다. 루터는 최후까지 설교·강의·권고·저술에 종사하고 귀족들의 분쟁화해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병으
종교적인 경험 혹은 신앙을 체험한 결과라고 하는 유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길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신학 사상적으로 루터의 어거스틴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컸다. 초년 시절에,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어거스틴의 일치시켜 칭의에 관한 스콜라철학적 견해에 반대하면서 죄와 은혜의 어거스틴의
그리스도를 무서운 심판주로 느껴 그분 앞에서 피할래야 피할 수 조차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 이 그리스도를 진노에 찬 심판주, 사형 집행인, 아니 마귀로 체험하였다고 한다.
루터는 이와 같은 하나님(감추어진 하나님)경험에서 마침내 복음을 발견한다. 그는 롬 1 :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
루터의 개혁사상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을 들 수 있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신학이었던 스콜라 신학은 11-12세기에 이르러 민중들의 신앙을 당시의 제도적이며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몰아갔다. 그러자 여기에 대한 반동으
루터의 종교개혁은 제후와 귀족들의 보호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정치윤리적 권고는 봉건주의적 질서를 뒷받침해 주는 보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칼빈은 종교적 박해를 피하여 모여들었던 인문주의자들, 자유 종교 사상가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에 의하여 비교적 거의 위협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