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융(馬融) ·정현(鄭玄) ·가규(賈逵) 등이 나타났고,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소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한의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밝혀 원래의 의미를 밝혔는데 이런 훈고학의 흐름은 삼국 ·육조(六朝)를 거쳐 당나라까지 이어졌으며,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마융·하휴·복건·허신 등이 가장 유명하였다. 그러나 음양오행과 참위의 설이 유학에 섞여들어 양한의 학은 순수한 공자의 교리가 아니었다. 정현에 이어 왕숙·왕필·하안·두예 등도 모두 훈고의 대가이었다. 당나라 때는 남북조와 수말 대란의 뒤를 이어 크게 학문을 일으켜 육덕명·아사고·공영달
한고조는 중국을 다스림에 문사(文事)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문을 크게 장려하였다. 그런데 진화의 액[秦火之厄]과 항우의 병선[項羽之兵]을 겪으면서 많은 중요한 전적(典籍)들이 사방으로 산실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당시의 학자들은 선진제가들의 학설을 수집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철
한대 경학
제국의 논리와 제국의 학문
1. 한 제국의 등장과 경학
한 나라 이후의 유가(儒家) 사상은 중국의 정치 현실을 지배해 온 사상으로 농경문화 중심사회에서 가장 적합한 통치 이념으로 받아 들여졌다. 하지만 유학은 표면적인 정치 이념이고, 중국 역사의 실질적인 힘은 법가(法家)적인 통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