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은 무너지고 도방은 해체되었다.
경대승이 사거한 후 무인집정에 된 사람은 이의민이었다. 무신란의 과정에서 왕위에 오른 명종은 여기 같은 사건을 계기로 입신한 무장인 이의민을 통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최충헌 형제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고려를 압박하며 조공과 무리한 요구를 일삼으며 고려에 대한 정복전쟁으로 내정간섭을 일삼으며 고려의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정치적 운영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고려 정부의 대몽 항전은 애국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신 집권자들의 사적인 권력 유지가 주요 목적이었고, 강
서적으로 알려진 무리의 크고 작은 봉기가 각지에서 있었다. 이와 같은 민란은 무신정권의 실정과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대한 서북계 농민들의 항쟁이 끈질기게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2008), 535-537쪽.
b. 망이․망소이의 난 (1176(명종 6년))
정권의 퇴진이라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로 인한 민주주의는 박정희 등 육사 8기생들의 정변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시민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② 유신 체제 반대 운동
1961년 5.16 군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