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도 아니며, 당대의 정지용처럼 이국정취에 취향을 보인 모더니즘의 시인도 아니며, 전통적인 리듬의 바탕 위에 인간의 순수 감정과 우리말의 정교한 아름다움을 탐구한 정통 시인이다. 영랑의 시적 비전은 식민지 현실에 대한 관심보다 유미탐구에 있다. 초기 시에서 영랑은 ‘내 마름’, ‘소색이
것을 강조했던 급진적인 시의 유파를 가리키는 말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시인들의 시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흐름이 있다. 이것은 서구 모더니즘이 지닌 두 흐름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하나는 정지용이나 김기림, 김광균 등으로 대표되는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을 지향하는 계열이라면, 다른
시 창작 동인 활동이 보여준 시의 순수 지향에서 잘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시적 기법의 실험과 주지적 태도, 주관적 정서의 절제, 도시적 감각과 시적 심상의 구성 등 모더니즘적 시의 경향을 보인다. 모더니즘 시론을 도입하고 주도했던 김기림은 ‘일종의 건축학적 설계’ 아래서 시가 이뤄진다고
김광균은 1914년 개성에서 태어나 송도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1938년 1월 조선일보에는 김광균의 약력이 ‘26세, 1912년 개성산, 상업학교를 거쳐 현직 회사원’으로 되어 있다. 그가 1914년 생이라면 그가 시를 발표한 것은 12세부터이고, 1912년 생이라면 14세부터이다. 문제는
불분명한 성격, 복수적 시점과 의식의 흐름 및 언어적 유희 등을 주요기법으로 하는 형식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이러한 모더니즘 경향을 지닌 한 무리의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주지파(主知派)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이상, 김기림, 김광균, 정지용 등이 속하며, 카프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