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곽묘, 목곽묘, 석곽묘가 함께 분포하고 있는 대규모 고분유적이다. 특히 130호 목관묘에서 확인된 청동검, 방제경, 호형대구, 철복, 판상철부 등은 1∼3세기에 있어서 경주지역의 정치적 수준과 경제력 및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지표가 되고 있다.
발굴조사결과 靑銅器時代 住居址를 비롯해 原三國時代
목곽묘가 중심을 이룬다. 따라서 김해의 양동리, 대성동 부산 복천동 등의 고분군의 목곽묘에서 출토된 철기 유적들은 발견된 유물이 이전시대의 동일지역 고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났다. 이는 철기문화의 중심이 이 시기에는 창원지역에서 김해지역으로 옮겨왔음을 알려준다. 김해
목곽묘일 가능성도 있으나, 이보다 앞선 연대로 추정되는 창원 덕산리 지석묘의 하부구조를 참작한다면 규모가 큰 석실묘일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시기 왜군에 의해 도굴이 되었으며, 그 이후 인조 25년(1641)에 능비를 세우고 고종 2년(1884)에 숭선전의 호를 내려 침전을 개축하였다.
왕릉구역 내에는
목곽묘가 확인됐으며, 대가야계 순금제이식(純金製耳飾)·마구류(馬具類)·대도(大刀)·꺽쇠·토기류·옥 등 2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일본은 그동안 ‘임나사현’(任那四縣)에 근거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임나사현’중 하나인 순천의 ‘사타국’의 지배층 무덤에서 일본계 유
목곽묘 =덧널무덤,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걸친 묘제로서,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내무에 상자형의 목곽을 짜서 봉토를 올린 것이다.
2기, 무덤방 입구를 갖춘 횡혈식석실분 =굴식돌방무덤, 돌을 이용해 목관이 들어가는 자리를 만드는 묘.
2기, 별다른 입구가 없이 현실을 돌로 만든 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