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이 새로운 사원을 창건하고 각 지방의 선사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호족들의 포섭과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호족인 중앙귀족문벌귀족과 권문세족에 대해 알아보고 내가 만일 고려 인종이었다면 이자겸의 난 그리고 묘청서경천도운동난을 어떻게 대처했을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III. 문벌귀족의 형성배경
신라말 중앙집권이 약해진 틈을 타 각 지방의 호족들이 봉기를 하고 그에 따라 각 세력들은 중앙의 힘에 의탁할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를 보호할 실력을 갖출 필요성이 있었다. 그에 따라 각 호족들은 서로 혼인관계를 맺어 피로 연결된 문벌을 형성하였다. 일단 문벌을 형성
문벌귀족사회는 최승로의 시무 28조가 나왔던 성종 대부터 중앙통치와 지방행정조직이 정비되면서 새로운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과거와 음서, 공음전 등 관직과 경제력까지 독점하였고, 왕실과 외척관계로 엮이면서 정권 장악은 더욱 견고해졌는데 과거 출신관리와의 갈등, 왕의 측
문벌귀족의 득세로 통치 질서가 위태롭게 되었으면서도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을 따름이다.
(1) 몇 몇 문벌귀족의 득세로 통치 질서의 문란
1) 여진정벌의 근본적인 이유
① 경제적인 이유 - 대규모의 농지 획득은 당시 많은 유망민에 대한 정책과 농경지 부족에 대한 국
가차원의
고려를 관료제 사회로 보아야 하는지 귀족제 사회로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동서양의 귀족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에 비추어 “귀족제 사회”로 보는 것은 그다지 무리가 없지만 “관료제 사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훨씬 더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