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은 격감하고, 공장은 조업단축에 들어가 1920년부터 전후공황에 시달리게 된다. 긴 불황에 설상가상으로 관동대지진이 덮쳤다. 1927년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이 지진 때문에 결제불능이 된 어음을 처리하기 위한 법안을 심의하는 과정에 대장성장관의 실언에서 경영이 부실한 은행이 있다는
정부에 대한 최후 통첩을 수교시켰다. 이에 영국 미국은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고 12월 9일 국민정부도 대(對)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선전을 포고하였으며 12월 11일에는 이탈리아가 대미선전(對美宣戰)을 각기 선언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따라서 뒤늦게 제2차대전에 말려든 미국을 포함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관동주가 설치되면서 군이 분리되어 관동군(關東軍)이란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런 관동군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있어서 선봉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2.동방회의(東方會議)와 만주 침략정책
1927년 4월, 강경한 중국 정복파인 다나카 기이치 등은 기존의 내각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러허성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일본의 군부는 일본 정국을 장악하고 정당내각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군국주의 체재를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 측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