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세비치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등 그에게 정치적인 후원을 해준다. 밀로셰비치는 1964년에 베오그라드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밀로세비치는 고등학교 때의 친구였던 미랴냐 마르꼬비치(Mirjanja Markovic)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세르비아 공산당 출신의 강경 노선 파로, 베오그라
코소보 분쟁은 종식되는 듯 보였으나, 평화유지군의 코소보 진주에도 불구하고 동 지역에서 간헐적인 유혈사태가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코소보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알바니아계의 세르비아계에 대한 역 테러가 자행됨으로써 밀로세비치가 퇴진하고 코소보 지방선거에서 온건파가 압승했음에도 불구
방침을 철회하고 EU 의장국인 영국도 밀로셰비치 대통령을 만나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신 유고연방은 코소보문제를 순수한 국내문제로 간주하여 국제사회의 개입 및 코소보의 분리 독립을 거부하였으며, 이에 대해 코소보 알바니아인은 국제사회의 적극적 개입을 유도하였다.
코소보는 역사적으로 제1차 불가리아 제국,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의 영토였다. 1389년부터 이슬람 국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제1차 세계대전때 독립한 코소보는 세르비아사람들에게는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항전한 성지로 여겨졌다. 소수의 세르비아인은 인구
코소보분쟁의 원인
1389년 코소보 평원에서는 오스만 터키군과 세르비아 중심의 발칸동맹 연합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여기서 오스만 터키가 승리하자 세르비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등 다뉴부 강 이남의 대부분이 오스만 터키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