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북괴’가 200억 톤의 물을 담은 거대한 금강산 댐을 무너뜨려 한반도 허리 부분을 완전히 황폐화하는 재해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뉴스를 발표하며, 중부지역에 사는 국민들이 한동안 공포와 불안에 떨게 됨
이에 대응하기 위해 평화의 댐을 쌓기 위한 성금 모금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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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기치 못했던 신군부 세력의 등장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근원적 이유가 국가안보의 위협을 구실로 한 권력구조에 있으며, 그 근원은 분단체제에 있기 때문에 분단의 극복, 곧 통일은 진정한 민주화의 길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ibid, p.91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張勉)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게 된다.
이상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과정과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대해 알아보았다. 이승만은 주로 미국 지역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해 민족지도자의 한
세력의 활동
▶ 한민당(한국민주당) : 송진우, 김성수. 임정봉대론. 우익보수세력의 중심.
▶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귀국 : 독촉중앙협의회--> 독촉국민회
▶ 임정세력 귀국 : 개인자격. 1945년 11월.
- 한독당(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법통론 주장.
▶ 중도세력(중도우파) : 안재홍, 김규식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