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 지방의 영주(營州)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발해국의 역사는 아직도 역사적으로 구명된 것이 뚜렷하지 않다. 발해의 역사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줄 만한 기전체, 편년체와 같은 체계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현대 발해사 연구는 옛 발해의 권역인 중국, 북한, 러시아 등지에서부터 발해 유적 발굴을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
3. 건국기의 대외관계
발해는 7세기 후반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까닭에 건국 초기부터 돌궐, 신라는 물론 적대국인 당과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전개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내체제의 안정을 기하였다.
가. 돌궐과의 외교적 교섭
발해
1993년에 북한은 평양 시내에서 단군릉을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그 안에서 단군왕검의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김일성의 지시로 장대한 분묘를 조영중이라고 전했다. 이로 인하여 한국 학계에서는 단군릉의 진위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일었으며, 북한이 단군왕검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분석하기 위
발해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는 중국 등 주변의 강대국과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에 우리는 비록 전공과목은 아니지만 소양을 갖춘 대학생으로서 우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한 작지만 힘찬 한걸음을 내딛기 위해 중국이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약탈하고 있는 지와발해 사가 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