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부흥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하지만 당은 매초성전투(675)와 기벌포전투(676)에서 신라에게 패한 후, 안동도후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다. 이로써 당은 패수 이남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부터 당의 고구려 지역에 대한 지배는 요동반도에 한정되었다.
당의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인 백강구전과 주유성전에 참전하는 등 부흥운동 진압에 투입되었다. 또한 당이 백제고지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곳곳에 당의 고위직을 제수 받았다. 태자 융은 백제 유민들을 안심 시키고 신라와의 회맹에 참석하는 등 당의백제 고지 지배와 백제 유민
백제를 공격, 김유신의 5만 병력과 합세하였다. 계백의 용전도 효과 없이 사비성이 함락된 후 4년간의 백제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백제는 망하였다.
(3) 고구려 멸망(668년) - 나 . 당 연합군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킴.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고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백제는 멸망하였으나 그 찬란한 문화는 남아...
백제 멸망이후 곧바로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부흥운동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 복신(福信)․도침(道琛)․풍(豊)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임존성․주류성 등지에서 부흥운동을 일으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奈勿王)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