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 왜에게 핍박을 받던 신라는 서쪽으로 당나라와 연합하여 동서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고구려·백제의 멸망은 실로 동아시아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중국의 우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한국은 중국에 예속되기 시작하였고, 왜는 그로
·宋)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
중국의 군현인 대방군(帶方郡), 낙랑군(樂浪郡)은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목지국이 주동이 된 마한은 대방군을 공격하여 태수를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끝내는 군현세력에 패배하여 나혜국을 비롯한 수십국이 연맹체를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맹
일본 하카다와 중국 적산, 초주, 연수향, 양주, 영파, 광주 등에 신라방, 신라소 등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여 신라, 당, 일본을 연결, 중계무역을 하는 등 세계 최초로 조공무역을 민간자유무역으로 발전시켰다. 해상왕 장보고는 당나라에 거주하고 있던 고구려, 백제 및 신라 유민을 모아 당의 남측 해안
문화적 관점에서는 서양이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위주로 한 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과 의무의 범위 내에서는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향유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있다. 반면에 한국은 혈연, 지연 등 개개인이 속한 조직이나 집단을 위한 의무, 헌신, 충성 등을 지향하는 집단주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