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에서의 활동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등
> 등과 사서(史書)로 《제왕연대력》이 있으며, 불교 관련되는 저술로 <부석존자존>,<법장화상전>, <석이성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四山碑銘)> 뿐이고 그 외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등에 기(記), 원문(原文), 찬(讚) 등이 전할 뿐이다.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하면 화엄 10찰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탄문(坦文, 900~975) 스님과 관련되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이 탄문의 탑비 명문에 의해 밝혀졌다. 이후 보원사는 화엄종의 성쇠와 궤를 같이 하여 고려 후반 이후로 사세가 기울어져 갔을 것으로 짐작된
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寺跡記) 등에 그가 지은 글의 편린이 전한다.
2. 작품 개관
「초조장서」는 『동문선』제 49권에 실려 있으며, 중국 당나라 희종시대에 일어난 황소의 난과 관련된 격문(檄文) 전쟁 중에 적군에게 자기 쪽의 위엄을 내세우고, 상대
법장의 주석서를 三大疏로 지칭하고 있으나 혜원의 것은 僞撰이라는 설과 함께 질로나 양으로 보아 원효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법장의 것은 원효의 것을 그 분과와 어구해석에 있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원효의 <<기신론소별기>>야말로 최고의 <<기신론>> 해설서라 할 수 있다. 원효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