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내의 반전 세력의 목소리가 높아만 갔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비난이 쇄도 하였다. 미국의 다정하고 충직한 벗 한국 만이 5만이라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였다. 1968년은 미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존슨은 베트남에서의 패배로 출마를 포기하였고 유력한 후보 로버트 케네디는 형을 본받
있는데 비해 남한이 뒤처지고 있어 케네디정부는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한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와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실시와 일본과의 관계 개선, 베트남전 파병으로 케네디정부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미국이지만 미국에 고분고분한 타국의 반
베트남을 폭격하고 남베트남에 상당한 미군 전투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대규모 전쟁 개입 결정의 근본적인 이유는 명백했다. 존슨 행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은 이전의 아이젠하워 및 케네디 정부의 지도자들처럼, 남베트남 정부가 공산 반도들을 패배시키는 것을 미국이 도움으로써, 자신
요구를 거절했다. 1950년 초반에 미국은 프랑스의 꼭두각시 정부 바오다이 정권을 인정했고, 프랑스가 호치민의 전쟁에 소요되는 비용을 보조했다. 왜냐하면 1949년 가을에 중국이 공산화 되었고, 1949년말에 소련이 최초로 원자 폭탄 실험을 성공했다. 1945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제3세계
중국의 봉쇄
케네디는 중국을 미국이 대면하고 있는 2개의 냉전국 가운데에서 더 위험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10세기까지 대부분이 중국 영토에 속했고 지금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의 경우에 중국이 지배 또는 통제를 하려고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 같았다. 만약 베트남이 공산화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