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데 비해 남한이 뒤처지고 있어 케네디정부는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한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와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실시와 일본과의 관계 개선, 베트남전 파병으로 케네디정부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미국이지만 미국에 고분고분한 타국의 반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하던 동맹 블록 간의 균형이 깨어지게 되었고. 1990년대 초부터 양국관계의 동맹적성격은 점차 엷어졌고 양국관계는 동맹관계에서 전략적 협력관계로 상당부분 변화하였다.
우리는 이렇듯 변화하는 북중관계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냉전이전시기, 냉전시기, 탈냉전시
1945년 7월 말에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분리해 나와 조선에서 당 건설과 해방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조선공작단을 결성했다는 사실이다. 조선공작단은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고 최용건을 당위원회 서기로 해서 성립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조국 귀환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의 당 건설과 해방사업을 준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 데탕트시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외교 인식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조선족의 방한을 허용하였으며 1982년 9월 제 12기 전국 대표 대회에서 ‘평화 공존 5원칙’ 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한국 역시 새로운 외교 국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정책적 차이는 국방비 지출, 대외무역정책, 대외원조정책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클린턴 행정부에서 부시 행정부로 넘어오는 시기, 과거 레이건 행정부 시기의 공화당 출신의 강경노선의 외교 안보 관련 인사들의 재등용은 강경파에 의한 외교정책 변화를 가져왔으며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